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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프 (Banff) 여행이야기 (2)

by 블랙우루스 2024. 1. 16.


다음날도 일어나자마자 옥상 Hot Tub 에서 몸을 녹였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밴프 시내를 벗어나 있어야 하므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레이크 루이스 (Lake Louise) 로 가는 8X Express 버스를 탔다. 미리 예약해야 앉아서 갈 수 있고, 예약하지 않으면 대기했다가 좌석이 남으면 탑승할 수 있다. 미리 예약을 했더라도 15분 먼저 가서 제때 들어가 앉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밖에 예약 없이 대기하던 사람들도 모두 탈 수 있었다.

루이스 호수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거리였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기 때문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 호수에 다다를 무렵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호수 앞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에메랄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탄성이 자연스레 나왔다.

레이크 루이스는 원래 원주민들이 작은 물고기의 호수라고도 불렀는데, 캐나다 총독의 아내인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의 이름을 따라 루이스 호수가 되었다. 호숫물 색깔이 청록색 에머럴드 빛을 띠는데 이는 빙하에서 녹은 물에 미세한 암석 가루가 부유되어 물이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이라 한다.

절경을 계속 보고 싶었으나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는 날씨가 곧 개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날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하는 수 없이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한 페어몬트 샤또 호텔로 들어갔다. 14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5성급 호텔인 이곳은 약 500개 객실을 갖춘 럭셔리 호텔인데, 보통 1박에 1천 불 정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고, 관광객들이 많은 탓인지 로비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내부가 통제되고 있었다. 몸도 녹일 겸 카페에서 따뜻한 라떼를 하나를 주문해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날씨의 변화가 없자 레이크 모레인을 먼저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15분 안에 레이크 모레인으로 이동하는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타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8X Express 버스를 예약할 때 모레인 호수로 이동하는 루트를 같이 구입할 수 있다. 모레인 호수로 이동하는 내내 작은 비가 내려 기대감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호수 앞에 다다르자 에메랄드 빛 물 색깔에 눈이 다시 켜졌으나 호수 반대편 먼 곳은 안개가 깔려있어 탁 트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나마 구름이 얇았던지 주변이 밝은 편이었고, 산과 호수와 나무와 안개가 비와 절묘하게 버무려져 오묘한 분위기를 내는 게 이색적이었다.

호수 앞은 기온이 더 낮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카페테리아에 길이 줄게 늘어서 있었다. 한 20분쯤 기다려 따뜻한 라테 한잔과 핫도그 한 개를 16불에 살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에메랄드 빛 호수를 보며 핫도그 먹는 장면이 나쁘지 않았다.


30분 이상을 더 기다렸으나 날씨는 쉽게 개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루이스 호수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 밖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무지개가 두 군데나 생겨났다. 먼 지역은 해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루이스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운되었던 기분이 살아나면서 여기서는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 전체를 눈에 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왼쪽에 Boathouse 가 보였다. 카누 (Canoe) 를 빌려주는 곳이었다. 원래 물을 싫어하지만 이것만은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6시까지만 운영을 하는데 이미 4시가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줄 + 카누를 타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앞에는 30여 팀 정도가 줄을 서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카누에 올라타고 노를 젓는지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처음 타보는 거라 약간 긴장도 되었다. 순서가 되자 안전에 대한 설명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소송할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다. 카누를 빌리는데 30분에 120불, 1시간엔 130불이라 주저 없이 1시간을 선택했다.

구명조끼를 단단히 입자 안전요원이 점검을 해줬고, 비상용 호루라기를 구명조끼에 걸어주었다. 만에 하나 배가 전복되는 등의 비상상황에 사용 하라며 안전요원이 항상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했다. 배가 전복될 경우 배를 잡고 대기하면 안전요원이 구하러 갈 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2미터 정도 되는 노를 2개 전달해 주었다.



보통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카누 뒤쪽에 타고 가벼운 사람은 앞쪽에 탄다. 3명까지 탑승이 가능한데 나머지 1명은 가운데에 타지만 노는 저을 수 없다. 카누에 몸을 실자 약간의 출렁임이 있었다. 안전요원이 처음에는 카누를 잘 잡고 있기 때문에 침착하게 착지만 하면 큰 문제는 없다. 자리를 잡고 노의 무게를 느껴보았다. 약간의 시뮬레이션도 머리로 해봤다. 안전요원이 물 쪽으로 카누를 살짝 밀어주자 공간이 생기어 천천히 노를 밀어보았다. 호수라서 그런지 물이 흐르는 방향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노를 젓는 대로 쉽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호흡이 가다듬어지자 물색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완전한 에메랄드 빛이었다. 구름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면 에메랄드 빛깔이 더 강해졌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니 저 멀리 산에는 눈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모르도르의 운명의 산으로 떠나는 반지원정대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산 쪽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유명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의 "레이크 루이스" 곡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이 눈앞에 계속 펼쳐졌다. 타다 보니 지나가는 카누에 손을 흔드는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앞 뒤로 한 방향씩 맡아서 노를 젓는 방법도 있지만 합이 잘 맞지 않는 경우 뒤에 앉은 사람이 양쪽 방향을 번갈아 젓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눈이 쌓인 산 쪽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기온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손 장갑은 필수다. 20여분쯤 지났지만 끝까지 가려면 15분은 더 가야 할 거리로 보였다. 무리라고 생각되어 뱃머리를 돌렸다.


반대편 모습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페어몬트 샤또 호텔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나무가 빼곡하고 뒤에는 산과 구름이 그리고 앞쪽에는 호수가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웠다. 역광 구도라 차분하면서도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몇 분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그야말로 인생 여행지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더 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